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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응답의 비결   권석례 / 미국 오하이오주 전문 임상 상담사   여러분도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을 받은 적이 있고 저자도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응답 받았던 적이 있기에 믿음으로 기도하면 응답 받는다는 점에 대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아무리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기도가 있다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전에 선교사로서 필요한 재정을 위해 기도한 적이 있다. 하나님께 필요한 재정을 채워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음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믿음으로 비행기 표를 예약했더니 예상치도 않은 곳에서 재정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나의 순종을 기다리고 계셨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순종할 때까지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면서 기도 응답의 비결을 배웠던 그때의 기억이 이 시간에 떠올라 나누어 보았다.   이러한 기도 응답의 원리는 재정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자녀를 위한 기도이든 진로를 위한 기도이든 하나님이 기쁘게 응답하시는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순종할 때이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을 마치 자판기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문하면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이다. 하나님도 인격체이므로 우리와 인격적으로 소통하기를 원하신다. 그런데도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초신자의 경우엔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무조건 들어주시는 특별한 은혜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신앙이 성장한 후에도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요구한다면 하나님의 반응이 전과 같지 않음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어린 자녀와 장성한 자녀에게 바라는 부모의 기대가 다르듯이 하나님도 우리의 신앙 수준에 따라 기대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사랑이므로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들으신다고 생각하겠지만 하나님이 듣기 싫어하는 기도가 있음을 이해하도록 하자. 하나님이 듣기 싫어하는 기도는 죄악을 품은 자의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자의 기도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잠언 28:9, 시편 66:18). 물론 기도 응답이 지연되는 것은 하나님의 때가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 경우라면 인내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면 될 것이다. 하지만 위의 말씀대로 우리 마음에 죄악이 있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서 하나님이 우리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회개가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거나 순종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번 기회에 방법을 바꾸어 보자.   하나님이 말씀하셨음에도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한다면 기도 응답이 지연될 뿐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과나무에서 사과를 따라고 말씀하셨는데도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면 얼마나 시간 낭비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기다리고 계신다. 기도 응답을 바란다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도록 하자.
상담(종합) 2024-11-03
정체성 회복을 위하여 권석례/미국 오하이오주 전문 임상 상담사   유튜브를 통해서 회자되는 젊은이들의 성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요즘 들어 자주 접하게 된다. 어린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과도기에 일어나는 정체성의 혼란은 성장 과정에 잠시 나타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혼란이 지속된다면 정신적 문제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정신적 장애를 진단하는 지침서인 디에스엠에 성별 불쾌감이라는 성 주체성 장애가 있다. 성별 불쾌감이란 출생 시 지정된 자신의 신체적 성별이나 역할에 대한 불쾌감이며 이로 인해 6개월 이상 지속적으로 괴로워한다면 이러한 진단을 받을 수있다. 성별 불쾌감이라는 진단이 아니더라도 이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에 우울증 치료를 받는 사람들도 있다. 이처럼 여성이면서 남성이 되기를 원하거나 남성이면서 여성이 되기를 바라는 데서 오는 정서적 스트레스로 상담소를 찾는 사람들이 증가하는 추세이다.   성별 불쾌감을 호소하는 인구가 증가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소셜 미디어의 영향으로 트렌스젠더의 삶을 동경하는 경우도 있고 의약 기술의 발달로 원하는 성으로 전환하는 호르몬 치료나 수술도 한몫하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성별 불쾌감이 없음에도 또래 친구들에게 받는 압박감으로 인해 성별 전환을 시도하기도 한다. 이처럼 성전환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전과 달리 개방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혼란스러운 성 정체성을 회복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이 문제의 해결점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때 가능하다. 하나님이 최초 인간인 아담과 하와를 지으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흡족해 하셨다.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실수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바라보시며 흡족해 하시는데 피조물인 우리가 자신의 본질을 싫다고 거절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시겠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분이 만드신 자기의 모습에 대하여 감사하지만 하나님을 거부하는 자는 하나님 형상을 닮은 자기 자신까지도 거부하는 것 같다. 성별 불쾌감은 자기 자신에 대한 거절로 보이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하나님에 대한 거절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의견에 따르지 말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시는 말씀에 동의하는 것이 성 정체성을 회복하는 비결이다.   다윗이 시편에서 자기를 신묘막측하게 지으신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드렸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될 때 하나님이 만드신 성 정체성을 그대로 인정하고 감사하게 될 것이다 (시편 139:14).  
상담(종합) 2024-11-06
기독교인의 행복 특권       지금 행복하십니까? 기독교인은 특혜받은 사람들입니다. 물론 행복한 분도, 행복하지 못한 분도 있습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세상 행복보다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내면의 기쁨을 누리며 잘살아가고 있는가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두 가지 부류의 대답을 듣게 됩니다.   “예, 저는 늘 기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아니오, 저는 교회를 다녀도 전혀 기쁘지가 않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기독교인은 모두 행복한 사람들인 줄 알았습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밝은 표정과 웃음을 입가에 머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간 신앙생활을 한 후에는“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걷는 게 기독교인데, 그 삶이 행복하겠는가”라며 기독교인은 광야를 걸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여겼습니다. 기독교인의 행복 특권을 부정했습니다. 출애굽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간 광야 길을 걸었으며, 가나안 땅으로 가는 곳곳에서 이민족과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전혀 기쁠 게 없는 고난의 행군이었습니다. 기독교인의 행복은 가식처럼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광야 길을 걸어가도 기뻐할 수 있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란 것을 압니다. 광야에서도 하나님의 임재와 영적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왜 이렇게 생각이 바뀌었냐구요. 성령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이후, 기독교인으로서 삶에 대한 생각이 변했습니다. 너무 감사한 순간이었고 놀라운 영적 체험이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내 안에서 영적 체험이 샘솟기를 기도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특권을 온전히 누리는 것, 그것은 항상 기뻐하는 삶이었습니다. 기독교인의 행복 특권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날마다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샬롬!  
신앙·교회·예배 2024-11-01
어머니의 마지막 유품   어머니의 유품 중에 제가 갖고 있는 보물은 <큰글자 성경>입니다. 어머니의 손 떼가 묻어 있고 너덜너덜합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분의 유품 중에서 가장 먼저 챙겨놓은 것이 성경책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아끼셨던 것이 성경책이었고 매일 돋보기를 쓰고 성경을 읽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가끔 고향집을 갔을 때, 어머니가 성경책을 읽는 모습을 보며 장난치듯이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그때마다 마치 재미있다는 듯이, 성경 속의 인물 이야기를 수수께기하듯이 꺼내 놓았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 야곱,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엄마! 아브라함이 몇 살에 죽었게요?” “.....,”   이렇게 장난치는 아들이 얄미웠는지, 한 번 흘깃 쳐다보고는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며, 이삭을 번제로 드리던 때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엄마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 위해 광야를 며칠이나 걸어갔게요?”라며 장난치듯이 말하곤 했습니다. 그분이 그리울 때, 어머니의 성경책을 다시 열어 보았습니다.   성경책에는 “말씀과 동행하는 한 날 되게 하소서”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척박했던 가족이라는 사막 위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이 우리 가계(家系)에서 복음의 씨앗이 되신 나의 어머니, 신앙의 계대를 이어가는 것은 사명이고 축복입니다. 어머니가 남겨주신 믿음의 유산을 잘 이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샬롬!    
신앙·교회·예배 2024-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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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 체험   달샘   하루 동안 하나님과는 몇 번이나 교제하십니까? 나는 갈망했습니다.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충분히 누리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그분의 임재를 체험하는 일, 살아계신 하나님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싶었습니다. 그분은 시공간을 초월한 전능하신 창조주이고 언제 어디에서나 교제가 가능했습니다.   예전에 서울에서 살 때였습니다. 아내와 딸들은 필리핀 유학 중이었으며, 나는 기러기 아빠로서 약 6년간을 홀로 살았습니다. 이때 서빙고 온누리교회의 예수제자학교를 다녔는데, 신학자와 목사님, 선교사님의 간증적인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때 추천받았던 책 중의 하나가 로렌스형제의 <하나님의 임재 연습>, 프랭크 루박의 <편지>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체험적인 연습을 통해서, 우리의 삶 속에서 그분의 임재를 매번 체험할 수 있다는 관점이었습니다. 프랭크 루박은 그의 책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기 위해 필요한 것을 제시했습니다.   “내가 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 끊임없이 마음으로 대화하며, 그분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여 이 시간을 영광스럽고 풍요롭게 만드는 일이다.”   프랭크 루박의 <편지>를 통해서, 내가 깨닫고 실천했던 것은 온종일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일이었습니다. 임재 체험 훈련의 결과는 하루 동안 그저 한두 번 하나님을 생각하거나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생활방식에서 벗어나 하루 동안 열 번 이상 하나님을 생각하고 교제하는 삶으로의 변화였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내가 마음의 문을 열고 언제나 하나님께 다가가기만 하면 그분은 늘 나와 동행하시는 분이시란 걸, 내 삶을 눈동자처럼 지키고 계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란 걸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체험은 그분과 끊임없이 교제하고 만나기 위한 나의 실천적인 생각이 중요했습니다. 샬롬!  
신앙·교회·예배 김장기 박사
2024-11-03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던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14:13-14).   2024년 1월 1일 새벽 시간에 뽑은 하나님의 말씀 카드는 최고였습니다. 매년 연초에 뽑았던 말씀들도 좋았지만, 제 입에선“우와~연초부터 이렇게 좋은 말씀 카드를 뽑다니”라는 감탄사가 쏟아졌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너무 좋아서, 여러 번 반복해서 읽으며 아예 외워버렸습니다.   시간날 때마다 말씀을 묵상했더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는 놀라운 비밀이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던지 행하시겠다는 절대적인 약속입니다. 예수님도 자기 이름을 걸고 우리에게 맹세하거나 약속하신 것이죠. 무엇을 구하던지 반드시 이루어주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름을 걸고 약속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고민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할 것인가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받게 해 주신다는데, 어떤 것을 구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다가왔습니다. 이런 와중에 인생 기도 제목들이 떠올랐습니다. 대중적으로 유익한 저서의 집필, 전 세계로 번역되어 나가는 좋은 책을 쓰는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참 놀라운 약속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6장 24절에서 다시 한번 그분의 이름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질 기쁨을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한번 기억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우리가 기쁨을 충만히 누리는 축복의 통로였습니다.   “지금까지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4)”  
신앙·교회·예배 김장기 박사
2024-11-01
영적 수면 상태       우리는 몸만 잠을 자는 게 아닙니다. 내 영성도 수면 상태에 머물 때가 많습니다. 주변에서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는 것이 크게 어렵지를 않았습니다. 물론 나도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했는데, 푹푹 쓰러져서 잠만 잤습니다. 너무 인간적이고 연약한 제자들이었습니다.   피곤했던 제자들은 영적 수면 상태에서 깨어나지를 못했습니다. 나도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지만, 너무 긴 시간을 깨어나지 못하고 잠만 잤습니다. 지금부터 약 35년 전에 예수님을 처음 만나고 구원의 은혜를 입었어도, 세상살이에 지치고 피곤해서 늘 잠만 잤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영적 수면 상태에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공생애 기간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제대로 깨닫지를 못해서 질책을 받았습니다.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나를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세상적인 삶은 지식과 경험을 통해서 넓혀나갈 수가 있지만, 영적인 삶은 전혀 체험도 이해도 부족해서 수면 상태에 빠진 잠든 자와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눈과 귀를 열고 하나님 나라와 영적 세계에 대해 알고 싶었습니다. 세상의 참 빛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셔서, 주의 말씀을 듣고 깨달으며 지키고 행하는 영적 각성이 있기를 간구합니다. 샬롬!  
신앙·교회·예배 김장기 박사
2024-11-01
기독교인의 행복 특권       지금 행복하십니까? 기독교인은 특혜받은 사람들입니다. 물론 행복한 분도, 행복하지 못한 분도 있습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세상 행복보다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내면의 기쁨을 누리며 잘살아가고 있는가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두 가지 부류의 대답을 듣게 됩니다.   “예, 저는 늘 기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아니오, 저는 교회를 다녀도 전혀 기쁘지가 않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기독교인은 모두 행복한 사람들인 줄 알았습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밝은 표정과 웃음을 입가에 머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간 신앙생활을 한 후에는“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걷는 게 기독교인데, 그 삶이 행복하겠는가”라며 기독교인은 광야를 걸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여겼습니다. 기독교인의 행복 특권을 부정했습니다. 출애굽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간 광야 길을 걸었으며, 가나안 땅으로 가는 곳곳에서 이민족과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전혀 기쁠 게 없는 고난의 행군이었습니다. 기독교인의 행복은 가식처럼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광야 길을 걸어가도 기뻐할 수 있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란 것을 압니다. 광야에서도 하나님의 임재와 영적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왜 이렇게 생각이 바뀌었냐구요. 성령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이후, 기독교인으로서 삶에 대한 생각이 변했습니다. 너무 감사한 순간이었고 놀라운 영적 체험이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내 안에서 영적 체험이 샘솟기를 기도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특권을 온전히 누리는 것, 그것은 항상 기뻐하는 삶이었습니다. 기독교인의 행복 특권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날마다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샬롬!  
신앙·교회·예배 김장기 박사
2024-11-01
세상 유혹의 3종 세트       세상 사람들은 유혹에 약합니다. 기독교인도 비슷합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참 안타까운 모습입니다(요일2:16). 성경에서 말하는 연약한 인간의 3종 유혹 세트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사탄, 또는 세상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게 기독교인의 현실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세상 유혹 앞에서 무참히 쓰러졌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베드로도 가롯유다도 넘어졌습니다. 사탄마귀가 기독교인을 넘어지게 만드는 대표적인 수작이 세상 유혹입니다. 이런 유혹은 하나님에게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이라고 말합니다. 과거보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세상 유혹은 더욱 극성스럽고 퇴폐적입니다.   세상 유혹을 이길 힘은 내게 없고 오직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부끄럽지만 자주 걸려서 넘어지는 게 무엇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물론 셋 다 강력한 세상 유혹이고, 때론 허무하고 쉽게 무너지는 나를 보았습니다. 혼란스러울 때도 많았습니다. 짙은 절망감 속에서 회개를 쏟아내야만 했습니다. 연약한 자아상이 문제였습니다.   솔직히 내겐 세상 유혹을 이겨낼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도 가장 취약했던 게 있는데 그것은 이생의 자랑, 즉 잘난 척입니다.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똑똑함을 과시하고 싶은 자만감입니다. 낮아져 섬기거나 겸손하지 못하고 도드라진 자아상, 병들고 썩은 내면의 모습을 대면할 때마다 역겨웠습니다.   이럴 때마다 내 의지로 세상 유혹을 참고 이겨낼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불가능했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의지하고 그분께 맡겨드려야만 가능했습니다. 나의 거짓된 자아상과 연약한 의지보다는 온전히 주를 의지할 때 넉넉히 이길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여전히 세상 유혹 앞에서 연약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의지하며 날마다 승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샬롬!      
신앙·교회·예배 김장기 박사
2024-11-01
하나님 중심주의     가만히 살펴보면 기독교인은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하나님 중심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 눈치를 살피는 사람 중심주의입니다.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는 자유의지를 가진 우리들의 몫입니다.   성경에는 이에 대한 예화가 너무 많았습니다. 사람 중심주의의 삶을 살다가 실패한 사례도 있고, 오직 하나님 중심주의로 살았던 인물도 있습니다. 이런 사례를 찾아볼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이스라엘의 초대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던 사울왕과 그다음을 이은 다윗왕이었습니다.   사울왕은 블레셋과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하나님보다는 백성들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았습니다. 이 모습을 본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왕의 범죄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그때에 사울왕은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나이다(삼상15:24)”라며 인정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눈앞의 백성들이 겁났습니다.   하지만 다윗왕은 달랐습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괴롭혔던 사울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사울왕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왕은“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삼상26:23)”라며 말했습니다. 자기 삶과 생명에 대한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중심주의의 신앙관이었습니다.   우리가 다윗왕처럼 하나님 중심주의로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살 것인지, 아니면 사울왕처럼 하나님보다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사람 중심주의로 살 것인지는 엄중히 새겨보아야만 합니다. 기독교인은 세상 사람들보다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사람보다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입니다. 샬롬!   달란트 칼럼니스트 김장기 박사      
신앙·교회·예배 김장기 박사
2024-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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