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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성도 케어(care) 방안   이동욱 박사, 장로 / 온누리교회   ‘가나안’ 약속의 땅이기도 하지만, 언젠가부터 ‘가나안’이라는 신조어는 '가나안'을 거꾸로 하면 '안나가'라는 문자이며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우리보다 앞서 미국에서는 이미 'Believing without Belonging(소속 없는 신앙)' 혹은 'Unchurches Christian (교회 없는 크리스천)' 같은 표현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들은 명목상 기독교인들인 셈이다. 가나안 성도들은 정체성이 뚜렷한 기독교인들이거나 구원의 확신은 없지만 스스로를 기독교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가나안 성도들은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추구하기 위해, 목회자와 교인들에 대한 불만, 신앙에 대한 회의 등 각각의 이유들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가나안 성도란 교회에 나가지 않지만 자신은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은 지 만 3년 남짓 지난 지금, 우리나라 개신교인 인구는 2022년 15%까지 떨어졌고, 개신교인 중 가나안 성도는 늘어 2023년 29%까지 치솟은 것으로 나타났다. 2012년 이후 11년간 무려 3배 가까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2023년 1월 현재 우리나라 총인구를 5,143만 명으로 봤을 때, 이 중 개신교인을 15%로 보면 개신교인은 약 771만 명(교회 출석자 545만 명, 가나안 교인 226만 명)으로 추정된다. 200만이 넘는 실로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책임 소재를 따지는 것을 떠나, 기독교 목회자, 리더십이라면 누구나 통회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가나안 성도’가 되었는가. 그 원인을 최근에 다루진 않았으나, 10년 전 조사에서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원해서’가 30.3%로 가장 많았고, 그다음인 ‘목회자에 대한 불만’도 24.3%에 달했다. 교회 재출석 시 희망하는 교회도 ‘올바른 목회자가 있는 교회’가 16.6%로 가장 많았다. 가나안 성도들이 목회자에 대해 얼마나 불신하고 실망하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수치다.   어떤 분석에 따르면 가나안 성도들은 신앙을 포기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관점과 다른 여러 신앙적 이유로 교회를 떠났기 때문에, 교회 공동체가 좋은 모습으로 변화된다면 70~80%는 다시 돌아올 것 같다고 추정한다. 가나안 성도들의 향후의 모습은 5가지 가능성 있다. 1. 자기에게 맞는 좋은 교회 찾아 믿음 생활을 함 2. 집, TV, 유튜브, 여행지에서 예배드림 3. 점점 믿음이 식어 아예 하나님도 떠나는 경우 4. 타 종교 가톨릭, 불교 등으로 개종하는 경우 5. 최악은 신천지, 하나님의 교회 등 이단에 미혹되는 경우다.   운전이나 여행하다 길 잘 못 들고 길을 잃으면 얼마간 시간 낭비하고 손해 보고 나서 U턴 하게 된다. 그러나 한 번뿐인 인생길에서 곁길로 빠지면 영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긍정적인 것은 기회 되면, 다시 교회로 돌아오겠다는 가나안 성도가 43%이다. 기회 되면 자신들이 찾는 교회로 가고 싶다는 것이다.   우리는 가나안 성도를 비난하기보다는 오히려 교훈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가나안 성도가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 교회가 이들의 필요를 채워주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가나안 성도들은 보편적인 성도들과 달리 맹목적인 충성을 강요하지 않고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권위적이지 않으며 다양한 영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콘텐츠를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진입하고 있는 한국 교회는 다양해지고 높아진 성도들의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고 있다. 한국 교회가 다양한 생각을 가진 개인들을 존중하고 포용하며 서로 간에 소통할 수 있는 공동체성을 회복함으로써 탈 교회 시대에도 진정한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다.   예배가 그리운 가나안 성도들이 스스로 교회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용기를 다시 불어넣어 주고, 그들을 초청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신앙·교회·예배 2024-11-03
어머니의 마지막 유품   어머니의 유품 중에 제가 갖고 있는 보물은 <큰글자 성경>입니다. 어머니의 손 떼가 묻어 있고 너덜너덜합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분의 유품 중에서 가장 먼저 챙겨놓은 것이 성경책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아끼셨던 것이 성경책이었고 매일 돋보기를 쓰고 성경을 읽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가끔 고향집을 갔을 때, 어머니가 성경책을 읽는 모습을 보며 장난치듯이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그때마다 마치 재미있다는 듯이, 성경 속의 인물 이야기를 수수께기하듯이 꺼내 놓았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 야곱,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엄마! 아브라함이 몇 살에 죽었게요?” “.....,”   이렇게 장난치는 아들이 얄미웠는지, 한 번 흘깃 쳐다보고는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며, 이삭을 번제로 드리던 때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엄마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 위해 광야를 며칠이나 걸어갔게요?”라며 장난치듯이 말하곤 했습니다. 그분이 그리울 때, 어머니의 성경책을 다시 열어 보았습니다.   성경책에는 “말씀과 동행하는 한 날 되게 하소서”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척박했던 가족이라는 사막 위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이 우리 가계(家系)에서 복음의 씨앗이 되신 나의 어머니, 신앙의 계대를 이어가는 것은 사명이고 축복입니다. 어머니가 남겨주신 믿음의 유산을 잘 이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샬롬!    
신앙·교회·예배 2024-11-03
내가 크리스천으로 살지 않았다면   달샘   때론 교만했습니다. 나보다 더 성공한 세상 친구들을 볼 때 스며든 후회였습니다. 훨씬 능력이 없는 것만 같은데 고위 관료가 된 친구, 언론사 사장이 된 친구, 부자가 된 친구들을 볼 때, 하나님 자녀로서의 삶에 대한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방과 후 교실에 남아 공부하고 있었는데, 교회를 다니던 자매님의 전도였습니다. 매주 귀찮게 찾아와서 교회를 가자고 보채는 바람에, 고등부 예배를 참석했고 그때부터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내가 크리스천으로 살지 않았다면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경쟁심으로 똘똘 뭉쳐 세상적인 성공만을 위한 일이라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현실 상황에 대한 불평불만도 많았겠지만, 이기적인 삶을 충족하려고 세상 종노릇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8:34)”   하나님을 모르는 삶, 그 안에는 온갖 생각과 행동도 죄성이 묻어났습니다. 지금도 영성이 부족해서 세상 욕심을 앞세우는 경우가 많은데, 하나님을 몰랐다면 어리석은 삶의 결실을 뒤쫓았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 때 예수님을 바라보면, 마음 깊은 곳에서 감사가 몰려 왔습니다.   구원받은 인생, 무척 다행입니다. 우리는 세상 유혹에 마음을 빼앗겨 흔들거릴 때가 참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자녀로서의 삶은 그 자체가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세상에서 종노릇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예수님, 날마다 예배와 기도와 찬양을 올려드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한 삶을 잘 이어갈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샬롬!  
신앙·교회·예배 2024-11-03
특별한 관계       사랑하고 싶으십니까? 생각만큼 간단하지를 않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과 비용을 감당해야 합니다. 어디 사랑하는 일이 마음 먹은 대로 잘 되던가요? 절대 그렇지를 않습니다. 남녀 간의 사랑은 미묘하고 복잡합니다. 운명처럼 엮인 두 사람이 처음부터 걸어가야만 할 현실입니다.   사랑은 특별한 인간관계이고 감정 상태입니다.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만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불러낼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현실에서 파악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사랑은 합리적으로 계산하거나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한때 바람처럼 지나가는 일시적인 게 아닙니다. 사랑할 때는 즐거움도 슬픔도 함께 공유하며,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감정적인 시간을 불태웁니다. 밤새 잠을 못 자고 티끌같이 굴러들어온 그녀가 갑자기 엄청난 부피로 늘어나는 게 사랑의 감정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의 무게감에 짓눌려 있어도 행복감은 세상을 다 가진 듯했습니다. 삶 전체를 휘감고 돌아가는 버거운 행복감, 사랑의 절정이고 묘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하는 겁니다.   대중적인 인기 드라마였던 <도깨비>에서 주인공 공유의 감정 고백이었습니다. 불멸의 삶을 살고 있던 도깨비 김신, 그는 캐나다 퀘벡의 한적한 공원에서 지은탁이 선물한 시집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 시집은 <사랑의 물리학>이라는 김인육 시인의 시詩였는데, 홀로 사랑의 무게감을 고백하던 전문이었습니다. 첫사랑이 갖는 엄청난 감정적인 무게감을 다루었습니다.   사랑의 물리학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제비꽃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 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 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순간, 나는 뉴턴의 사과처럼 사정없이 그녀에게로 굴러떨어졌다. 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전자운동을 계속하였다. 첫사랑이었다. -출처: 김인육, <사랑의 물리학>, 문학세계사, 2016-   나는 사랑의 질량감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표현한 시詩를 읽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시詩의 전문에서 느껴지던 사랑의 무게감은 작은 씨앗에 불과했는데, 제비꽃 같았던 조그만 계집애가 지구보다도 훨씬 더 크게 부풀어 올랐습니다. 하늘거리던 계집애가 안겨주는 사랑의 질량감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부풀어 오르는 게 사랑입니다.   부끄럽게도 심장은 쿵쾅거리고 마음은 한없이 계집애를 향해 굴러떨어졌다.   불멸의 도깨비에게도 일생에서 한두 번밖에 경험할 수 없던 아찔했던 순간, 누군가를 향한 몰입의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사랑할 때의 심장은 그녀를 볼 때마다 콩닥거리던 전자운동이 일어났으며, 눈에는 불꽃이 튀고 정신 줄을 놓아버릴 지경이었습니다. 금방이라도 활화산처럼 터져버릴 것만 같은 심장, 일찍이 전신에서 묘한 흥분을 불러내고 뜨겁게 달아오르던 일을 경험한 적이 없었습니다. 첫사랑의 감정 상태입니다.   사랑하니까, 둘 사이에서 마음을 빼앗긴 특별한 전자운동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신앙·교회·예배 2024-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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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깍지의 사랑   행복작가 달샘     최대한 관심을 갖는 것만큼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음먹은 만큼 사랑할 수 있는 겁니다. 연애의 짜릿함은 스무 살 전후에 남녀 사이에서 처음 발동했던 애틋함이 시발점이었습니다. 얼마나 첫사랑을 하고 싶었는지 모를 정도였습니다. 꿈에서도 평생 짝꿍을 만나고 싶었는데, 이해타산에 맞는 이성적 판단을 초월한 감정이 먼저 심장을 뒤흔들었습니다.   내 영혼의 반쪽, 인생 반쪽을 만나면 이성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고 생각보다는 마음이 먼저 알아본다.   그래서일까요. 자기 인생의 반쪽을 찾아가는 일이 일생일대의 중대사인 청춘남녀도 있었으며, 빨리 만나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얼마나 반쪽을 찾는 일이 시급했으면, 마치 사랑을 찾아 도시를 떠도는 하이에나와도 같았을까요.   남녀관계에서 사랑에 대한 집착은 무척이나 심각했습니다. 지독한 애정 관계에 사로잡히면, 마음에선 ‘상사병’이라는 심리적인 불치병을 앓았습니다.   상사병, 말 그대로 사랑병이다!     누군가를 그리워할 때, 발병하는 애틋한 마음의 병입니다. 부부의 인연因緣은 집착에 가까운 상사병에서 시작했습니다. 제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며, 누군가에게 실컷 반해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고 끌려가던 블랙홀 현상이 마음에서 일어났던 겁니다.   마음은 온종일 쿵쾅거렸습니다. 우연을 가장해서 필연적인 연애 기회를 창출하고 싶어서 별의별 생각을 다 떠올려 보았습니다. 몸부림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첫눈에 반한 콩깍지 상태는 머리는 이성적이어도 가슴은 합리적인 지각과 사유, 판단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녀는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요.” “눈빛만 스쳐도, 이상하게 가슴이 콩닥거렸어요.”   이쯤 되어야 콩깍지 증상입니다. 온종일 애틋한 감정에 휩싸여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사랑은 그리움으로 똘똘 뭉쳐 아름다운 장미꽃을 피워냈습니다. 이건 상상력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과학적인 검증이기도 했습니다. 남녀 간의 사랑은 우주 속의 물리적인 존재들과 같이 끌어당김의 법칙이 작동했습니다.   사랑에 빠지면 한없이 끌어당기고 또 끌려가는 현상, 눈에 보이지 않아도 사랑의 힘은 상상력을 초월한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사랑의 힘은 눈부셨습니다.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던 불나방과도 같았으며, 몰입된 감정 상태는 모든 것을 태워 버릴 듯했습니다. 몇 날 며칠 생각을 붙잡고 점점 부풀어 오르던 사랑의 부피는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몰입된 감정 상태는 그리움의 극한지점까지 도달했으니까요.  
신앙·교회·예배 김장기 박사(시인)
2024-11-03
가나안 성도 케어(care) 방안   이동욱 박사, 장로 / 온누리교회   ‘가나안’ 약속의 땅이기도 하지만, 언젠가부터 ‘가나안’이라는 신조어는 '가나안'을 거꾸로 하면 '안나가'라는 문자이며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우리보다 앞서 미국에서는 이미 'Believing without Belonging(소속 없는 신앙)' 혹은 'Unchurches Christian (교회 없는 크리스천)' 같은 표현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들은 명목상 기독교인들인 셈이다. 가나안 성도들은 정체성이 뚜렷한 기독교인들이거나 구원의 확신은 없지만 스스로를 기독교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가나안 성도들은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추구하기 위해, 목회자와 교인들에 대한 불만, 신앙에 대한 회의 등 각각의 이유들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가나안 성도란 교회에 나가지 않지만 자신은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은 지 만 3년 남짓 지난 지금, 우리나라 개신교인 인구는 2022년 15%까지 떨어졌고, 개신교인 중 가나안 성도는 늘어 2023년 29%까지 치솟은 것으로 나타났다. 2012년 이후 11년간 무려 3배 가까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2023년 1월 현재 우리나라 총인구를 5,143만 명으로 봤을 때, 이 중 개신교인을 15%로 보면 개신교인은 약 771만 명(교회 출석자 545만 명, 가나안 교인 226만 명)으로 추정된다. 200만이 넘는 실로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책임 소재를 따지는 것을 떠나, 기독교 목회자, 리더십이라면 누구나 통회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가나안 성도’가 되었는가. 그 원인을 최근에 다루진 않았으나, 10년 전 조사에서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원해서’가 30.3%로 가장 많았고, 그다음인 ‘목회자에 대한 불만’도 24.3%에 달했다. 교회 재출석 시 희망하는 교회도 ‘올바른 목회자가 있는 교회’가 16.6%로 가장 많았다. 가나안 성도들이 목회자에 대해 얼마나 불신하고 실망하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수치다.   어떤 분석에 따르면 가나안 성도들은 신앙을 포기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관점과 다른 여러 신앙적 이유로 교회를 떠났기 때문에, 교회 공동체가 좋은 모습으로 변화된다면 70~80%는 다시 돌아올 것 같다고 추정한다. 가나안 성도들의 향후의 모습은 5가지 가능성 있다. 1. 자기에게 맞는 좋은 교회 찾아 믿음 생활을 함 2. 집, TV, 유튜브, 여행지에서 예배드림 3. 점점 믿음이 식어 아예 하나님도 떠나는 경우 4. 타 종교 가톨릭, 불교 등으로 개종하는 경우 5. 최악은 신천지, 하나님의 교회 등 이단에 미혹되는 경우다.   운전이나 여행하다 길 잘 못 들고 길을 잃으면 얼마간 시간 낭비하고 손해 보고 나서 U턴 하게 된다. 그러나 한 번뿐인 인생길에서 곁길로 빠지면 영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긍정적인 것은 기회 되면, 다시 교회로 돌아오겠다는 가나안 성도가 43%이다. 기회 되면 자신들이 찾는 교회로 가고 싶다는 것이다.   우리는 가나안 성도를 비난하기보다는 오히려 교훈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가나안 성도가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 교회가 이들의 필요를 채워주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가나안 성도들은 보편적인 성도들과 달리 맹목적인 충성을 강요하지 않고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권위적이지 않으며 다양한 영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콘텐츠를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진입하고 있는 한국 교회는 다양해지고 높아진 성도들의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고 있다. 한국 교회가 다양한 생각을 가진 개인들을 존중하고 포용하며 서로 간에 소통할 수 있는 공동체성을 회복함으로써 탈 교회 시대에도 진정한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다.   예배가 그리운 가나안 성도들이 스스로 교회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용기를 다시 불어넣어 주고, 그들을 초청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신앙·교회·예배 이동욱 박사
2024-11-03
특별한 관계       사랑하고 싶으십니까? 생각만큼 간단하지를 않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과 비용을 감당해야 합니다. 어디 사랑하는 일이 마음 먹은 대로 잘 되던가요? 절대 그렇지를 않습니다. 남녀 간의 사랑은 미묘하고 복잡합니다. 운명처럼 엮인 두 사람이 처음부터 걸어가야만 할 현실입니다.   사랑은 특별한 인간관계이고 감정 상태입니다.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만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불러낼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현실에서 파악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사랑은 합리적으로 계산하거나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한때 바람처럼 지나가는 일시적인 게 아닙니다. 사랑할 때는 즐거움도 슬픔도 함께 공유하며,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감정적인 시간을 불태웁니다. 밤새 잠을 못 자고 티끌같이 굴러들어온 그녀가 갑자기 엄청난 부피로 늘어나는 게 사랑의 감정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의 무게감에 짓눌려 있어도 행복감은 세상을 다 가진 듯했습니다. 삶 전체를 휘감고 돌아가는 버거운 행복감, 사랑의 절정이고 묘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하는 겁니다.   대중적인 인기 드라마였던 <도깨비>에서 주인공 공유의 감정 고백이었습니다. 불멸의 삶을 살고 있던 도깨비 김신, 그는 캐나다 퀘벡의 한적한 공원에서 지은탁이 선물한 시집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 시집은 <사랑의 물리학>이라는 김인육 시인의 시詩였는데, 홀로 사랑의 무게감을 고백하던 전문이었습니다. 첫사랑이 갖는 엄청난 감정적인 무게감을 다루었습니다.   사랑의 물리학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제비꽃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 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 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순간, 나는 뉴턴의 사과처럼 사정없이 그녀에게로 굴러떨어졌다. 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전자운동을 계속하였다. 첫사랑이었다. -출처: 김인육, <사랑의 물리학>, 문학세계사, 2016-   나는 사랑의 질량감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표현한 시詩를 읽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시詩의 전문에서 느껴지던 사랑의 무게감은 작은 씨앗에 불과했는데, 제비꽃 같았던 조그만 계집애가 지구보다도 훨씬 더 크게 부풀어 올랐습니다. 하늘거리던 계집애가 안겨주는 사랑의 질량감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부풀어 오르는 게 사랑입니다.   부끄럽게도 심장은 쿵쾅거리고 마음은 한없이 계집애를 향해 굴러떨어졌다.   불멸의 도깨비에게도 일생에서 한두 번밖에 경험할 수 없던 아찔했던 순간, 누군가를 향한 몰입의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사랑할 때의 심장은 그녀를 볼 때마다 콩닥거리던 전자운동이 일어났으며, 눈에는 불꽃이 튀고 정신 줄을 놓아버릴 지경이었습니다. 금방이라도 활화산처럼 터져버릴 것만 같은 심장, 일찍이 전신에서 묘한 흥분을 불러내고 뜨겁게 달아오르던 일을 경험한 적이 없었습니다. 첫사랑의 감정 상태입니다.   사랑하니까, 둘 사이에서 마음을 빼앗긴 특별한 전자운동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신앙·교회·예배 김장기 박사
2024-11-03
어머니의 마지막 유품   어머니의 유품 중에 제가 갖고 있는 보물은 <큰글자 성경>입니다. 어머니의 손 떼가 묻어 있고 너덜너덜합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분의 유품 중에서 가장 먼저 챙겨놓은 것이 성경책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아끼셨던 것이 성경책이었고 매일 돋보기를 쓰고 성경을 읽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가끔 고향집을 갔을 때, 어머니가 성경책을 읽는 모습을 보며 장난치듯이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그때마다 마치 재미있다는 듯이, 성경 속의 인물 이야기를 수수께기하듯이 꺼내 놓았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 야곱,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엄마! 아브라함이 몇 살에 죽었게요?” “.....,”   이렇게 장난치는 아들이 얄미웠는지, 한 번 흘깃 쳐다보고는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며, 이삭을 번제로 드리던 때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엄마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 위해 광야를 며칠이나 걸어갔게요?”라며 장난치듯이 말하곤 했습니다. 그분이 그리울 때, 어머니의 성경책을 다시 열어 보았습니다.   성경책에는 “말씀과 동행하는 한 날 되게 하소서”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척박했던 가족이라는 사막 위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이 우리 가계(家系)에서 복음의 씨앗이 되신 나의 어머니, 신앙의 계대를 이어가는 것은 사명이고 축복입니다. 어머니가 남겨주신 믿음의 유산을 잘 이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샬롬!    
신앙·교회·예배 김장기 박사
2024-11-03
내가 크리스천으로 살지 않았다면   달샘   때론 교만했습니다. 나보다 더 성공한 세상 친구들을 볼 때 스며든 후회였습니다. 훨씬 능력이 없는 것만 같은데 고위 관료가 된 친구, 언론사 사장이 된 친구, 부자가 된 친구들을 볼 때, 하나님 자녀로서의 삶에 대한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방과 후 교실에 남아 공부하고 있었는데, 교회를 다니던 자매님의 전도였습니다. 매주 귀찮게 찾아와서 교회를 가자고 보채는 바람에, 고등부 예배를 참석했고 그때부터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내가 크리스천으로 살지 않았다면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경쟁심으로 똘똘 뭉쳐 세상적인 성공만을 위한 일이라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현실 상황에 대한 불평불만도 많았겠지만, 이기적인 삶을 충족하려고 세상 종노릇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8:34)”   하나님을 모르는 삶, 그 안에는 온갖 생각과 행동도 죄성이 묻어났습니다. 지금도 영성이 부족해서 세상 욕심을 앞세우는 경우가 많은데, 하나님을 몰랐다면 어리석은 삶의 결실을 뒤쫓았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 때 예수님을 바라보면, 마음 깊은 곳에서 감사가 몰려 왔습니다.   구원받은 인생, 무척 다행입니다. 우리는 세상 유혹에 마음을 빼앗겨 흔들거릴 때가 참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자녀로서의 삶은 그 자체가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세상에서 종노릇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예수님, 날마다 예배와 기도와 찬양을 올려드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한 삶을 잘 이어갈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샬롬!  
신앙·교회·예배 김장기 박사
2024-11-03
왕(王)의 기도   달샘   기독교인에게 기도는 삶의 양식과도 같습니다. 왕(王)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길 간구합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 또는 교제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기도로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귀찮게 해드리지는 않는답시고 웬만한 일에는 기도하지를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신앙관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기도는 내게 꼭 필요한 것만을 구하는 일이라고 단순하게 여겼습니다. 이런 모습을 인지한 해븐리터치 미니스트리(HTM)의 손기철 장로님은 왕(王)의 기도를 주장했습니다.   왕(王)의 기도는 하나님께 구하고 드리는 기도,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기도,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기도라며 말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왕의 기도를 배우고 사용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결국은 왕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기도여야만 했습니다.   나는 주로 어떤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를 묵상했습니다. 지금 당장 눈앞에 놓여 있는 현실문제 해결에 대해 급급했습니다. 늘 이런 식이었습니다. “하나님! 저 조금만 도와주세요. 이번 한 번만 더 해결해 주세요.”라는 갈급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도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현실문제 해결을 위한 급급함보다는 항상 하나님께 구하고 교제하며, 그분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어드리는 선한 기도의 단이 될 수 있기를 간구드립니다. 샬롬!  
신앙·교회·예배 김장기 박사
2024-11-03
인생 가이드(Life Guide)   달 샘   어떻게 살아야만 합니까? 기독교인이든 세상 사람들이든 공통된 질문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인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야만 합니다. 기독교인은 인생 길잡이이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은혜로 예수님께 선택받았으며, 영생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 살아가는 특권을 가졌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는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10:25)”   이때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참으로 영생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는가입니다. 현실 상황에 맞추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적당히 비위를 맞추며 살고 있지는 않는가입니다.   나는 그럴 때가 많았습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다시 돌아가는 순간부터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를 게 없었습니다. 교회에선 기독교인, 세상에선 이기주의자였습니다. 좀 더 잘살려면 독하고 냉정해지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이웃 사랑을 삶의 중심에 놓고 살아가는 일,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삶의 교훈입니다. 늘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기를 간구합니다. 인생 길잡이이신 예수님과 함께, 이 땅에서도 영생의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샬롬!      
신앙·교회·예배 김장기 박사
2024-11-03
무한반복 기도하라!   달샘   한때는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자정이 되면 무릎을 꿇고 하루일과를 마치는 감사기도와 함께, 미래의 삶을 위한 기도의 단을 쌓았습니다. 미래의 인생계획을 하나님께 맡겨드렸습니다. 하지만 전혀 기도의 응답은 없었고, 내 기도 자체가 소용이 없는 것만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선 전혀 꿈쩍하지도 않으시고 오히려 다른 응답이 일어났습니다. 현실 속에서의 삶은 더욱 악화될 뿐이었습니다. 마음에는 낙심만 솟아났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가에 대한 불신도 함께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불거졌습니다. 죽은 나사로의 오누이였던 마르다와도 같은 원망 섞인 모습이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11:21)”   하지만 우리는 실망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도 이틀이나 더 머물다가 찾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때를 기다리신 이유였습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이제 역전되리라>는 복음성가에선 눈앞의 상황이 마음을 짓눌러도 기도를 멈추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상황을 세밀히 지켜보고 계십니다. 현실 속에서 모든 게 내게 불리해도, 계속해서 멈추지 말고 기도의 입술을 지킬 수 있기를 간구 드립니다. 샬롬!   “모든 게 모든 게 불리해도 너는 기도를 계속해라”  
신앙·교회·예배 김장기 박사
2024-11-03
왜 힘든 길을 걷게 하시나요   달샘   기독교인의 삶은 광야였습니다. 평탄한 길을 걸어갈 것만 같았는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생길이 있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생길이 펼쳐집니다. 약속된 축복의 길 위에는 고난이 흘러갔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재산을 모으고 종들까지 두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란은 풍요로운 곳, 살기 좋은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이주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원했던 인생길과는 크게 달랐습니다. 고향과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12:1)”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 칠십오 세였습니다. 늙은 나이에 길을 떠났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갔지만 그 땅에는 기근이 들고 바로의 고관들이 아름다운 아내 사라를 빼앗아 갔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선 조카 롯이 사로잡히고 재물까지 약탈당했습니다. 네게브 땅에선 그랄 왕 아비멜렉이 아내 사라를 또 데려갔습니다. 가정 분란으로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았습니다. 온갖 고난과 수모, 아픔을 감내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명령과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지키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창26:5).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힘든 인생길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주(主)의 은혜를 깊이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샬롬!    
신앙·교회·예배 김장기 박사
2024-11-03
기독교인의 행복   달샘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오랜 기간 내가 갖고 있던 의문은 ‘기독교인의 행복’이었습니다. 성경에는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어쩌면 세상살이에 대해 분노하고 불만투성이인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그 이유를 밝혀보고자 했습니다.   너무 간단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겠다고 맹세했어도, 삶에 대한 불안감과 자의식, 지식과 경험에 휩싸여 있는 거짓 자아를 내려놓지를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고 영이시며 진리라고 인정해도, 그분을 통한 참된 평강과 기쁨을 누리지를 못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우리가 누려야 할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일에 대한 염려와 걱정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면 기독교인의 행복은 세상적이고 외적 조건들이 절대로 아닙니다. 돈이나 명예, 권력과 같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참된 평안과 기쁨입니다. 하지만 진실로 이런 평강과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듭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삶의 평강과 기쁨을 맛보며 생활하고 있는가입니다. 기독교인의 참된 행복이 함께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샬롬!  
신앙·교회·예배 김장기 박사
2024-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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